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네이아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이후 ===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대패로 인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더 이상 마케도니아와 필리포스 2세를 막을 힘이 없었다. 공성전을 우려하여 아테네와 코린트는 성벽을 구축하는 데 안간힘을 썼지만, 필리포스 2세는 도시를 공성할 의도도, 그리스를 정복할 의도도 없었다. 그는 원정을 떠났을 때 안정된 그리스가 후방에서 있어주기를 바랬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연합군의 주축이었던 테베와 아테네에겐 제재가 가해졌다. 테베의 반 마케도니아 정치가들은 추방되고 친 마케도니아 정치가들이 돌아왔으며, 군 병력을 주둔시켰다. 또한 사로잡힌 포로들은 돈을 내고서야 석방되었으며 전사자들의 유해도 돈을 내야만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에티아 동맹을 해체하지는 않았다. 반면 아테네에 대한 제재는 테베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제2차 아테네 동맹이 해체되었지만, 사모스 식민지는 그대로 아테네에게 남았으며 포로들은 보석금 없이 석방되었다. 이는 아테네의 해군력을 이용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필리포스 2세는 전략 요충지를 차지한 코린트와 할키스를 방문하여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으로, 군 병력을 주둔시켜 통로를 확보한 후 스파르타로 발길을 돌렸다. 스파르타는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으나, 다른 도시국가들이 약해진 상황을 이용해 세력을 넓힐 우려가 있었기에 싹을 자르기로 한 것. 스파르타 지도자들이 논의에 참석을 거부하자, 필리포스 2세는 라코니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군을 주둔시켜 다른 도시국가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 기원전 337년에 코린트 동맹이 결성되고 필리포스 2세가 의장이 되면서 그리스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모든 도시국가들에게는 자치와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된 셈이었므로, 이에 불만을 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한 직후 테베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도시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후방이 안정되자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를 떠나 북쪽으로 향하지만, 암살당하고 그 원정은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어받게 된다. [[헬레니즘 제국|'''그렇게 세계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전설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